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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관념은 사람을 구원한다.E.M.포스터의 <하워즈 엔드>중...

.스트라이크. 2012. 4. 24. 07:00

 

p308 ~ 311

 

 

"걱정 마세요." 그가 말했다. "저는 참을 수 있어요. 제가 직장만 구하면 괜찮을 거예요. 제가 직장만 구하면 - 꾸준한 그런 직장을요. 그러면 다시는 그렇게 나빠지지 않을 거예요. 저는 전처럼 책을 좇지 않아요. 제대로 된 직장만 구하면 우리는 다시 안정될 거예요. 그러면 생각 자체를 안 하게 되겠죠."

"어떻게 안정된다는 거예요?"

"그냥 안정되는 거죠."

"인생이 본래 그렇다는 건가요?" 헬렌이 목이 멘 듯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우리가 봐주고 해주기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음악이 있고...... 밤길의 산책이 있고......"

"직장 있는 남자한테는 밤길 산책도 좋죠." 그가 대답했다.

"아, 전에 제가 헛소리를 너무 많이 했어요. 하지만 집에 집행관이 한 번만 들이닥쳐 보면, 그런 생각은 확실하게 떨칠 수 있습니다. 집행관이 제가 읽던 러스킨과 스티븐슨의 책들을 뒤적이는 걸 본 순간, 저는 인생을 똑바로 보게 되었어요. 별로 아름다운 인생은 아니지요. 책들은 슐레겔 양 덕분에 다시 돌아왔지만, 그 의미는 예전과 다를 겁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밤중에 숲을 걷는 일을 멋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왜요?" 헬렌이 창문을 열어젖히며 물었다.

"왜냐하면 사람은 돈이 있어야 하니까요."

"그렇다면 틀렸어요."

"틀렸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성직자도 재산이 있거나 봉급을 받죠. 시인이나 음악가들도 마찬가지예요. 떠돌이도 다르지 않아요. 떠돌이는 결국 구빈원에 가서 다른 사람들의 돈을 받으니까요. 슐레겔 양, 이 세상에서 진정한 것은 돈이예요. 나머지는 모두 꿈입니다."

"아직도 틀렸어요. 당신은 죽음을 잊었어요."

레너드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가 영원토록 산다면 당신 말이 옳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모두 죽어야 돼요. 얼마 후에는 인생을 떠나야 한다고요. 우리가 영원히 산다면 부정과 탐욕이 진정한 거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다른 것에 매달려야 해요. 왜냐하면 죽음이 오고 있으니까. 나는 죽음을 좋아해요. 병적인 선호가 아니라 죽음이 모든 걸 설명해 주니까요. 죽음은 돈의 공허함을 설명해 줘요. 그러니까 영원한 적은 죽음과 삶이 아니라 죽음과 돈이예요. 죽음 저편에 무엇이 있건 그건 상관없어요, 바스트 씨. 어쨌거나 그곳에서 시인과 음악가와 떠돌이는 '나는 나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보다는 분명히 더 행복할 거예요."

"글쎄요."

"우리는 모두 안개 속에 있어요. 하지만 가장 깊은 안개 속에 있는 건 윌콕스 부자 같은 사람들이이예요. 아주 멀쩡하고 번듯한 영국인이죠! 제국을 건설하고, 온 세상을 자기들이 생각하는 상식 속으로 우겨넣는 사람들 말이예요. 그런 사람들한테 죽음 이야기를 하면 화낼 거예요. 왜냐하면 죽음이야말로 진정한 제국이니까. 죽음이 영원토록 그들에게 반대를 외칠 거니까요."

"저도 죽음이 두렵긴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죽음에 대한 관념을 두려워하진 않죠."

"둘이 뭐가 다른데요?"
"엄청난 차이가 있죠." 헬렌이 더욱 심각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생략)..."죽음은 사람을 파괴해요. 하지만 죽음에 대한 관념은 사람을 구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