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인가를 설명할 때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그 예가 우리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논증하는 근거
 로 쓰일 때 그런 일련의 과정을 '예증'이라 부른다. 그리고 우리는 이번에도 자신에게 유리한 '예'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예를 선택했을 때 비로소 우리의 예증은 설득력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설득력 있는 예증이란 자신에게만 유리한 '편파'적인 예를 통해 완성된다. 단, 그 예가 너무 노골적이고 졸렬하면 상대에게 들켜 설득력을 잃어버리므로 얼마나 교묘한 예를 드는가가 논객의 실력을 좌우한다고 하겠다. 이제부터 예로 들 이반 카라마조프의 논쟁은, 그러한 교묘한 예의 최고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아이들을 예로 든 이유는?

 

 이반 카라마조프가 논쟁을 전개한 것은 소설 속의 '반역'이란 장에서이다. 이 '반역'은 그 유명한 '대심문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핵심은 이반의 작품인 극시(劇詩) '대심문관(大審問官)'이라고 한다. 이 '대심문관'은 '반역' 뒤에 나오는 장(章)이다 - 역주)의 앞장으로, 너무도 충격적인 '대심문관'에 가려 그다지 빛을 보지 못한 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사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장은 결코 '대심문관'에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훌륭하다.
 이반 카라마조프는 견습 수도사인 알료샤 카라마조프에게 자신은 신이 창조한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오해를 막기 위해 덧붙여 말하자면, 이반은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소설 속에서 이반이 격렬하게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이유는 오히려 '신의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반이 인정하지 않는 것은 신의 존재가 아니라 신이 창조한 세계이다. 좀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알료샤에게 이러한 자신의 관점을 설명한 이반은 다음과 같은 애매한 말로 이야기를 계속한다.

 


 
    이런 얘기는 그만하자. 나로서는 단지 너에게 나의 관점을 보여 주면 되는 거니까. 나는 대
    체로 인류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일부 아이들의 고통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편이 더 낫겠어. 그것이 내 논증의 범위를 10분의 1로 축소시키겠지만, 그래도 일부 아이들
    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편이 더 나을 거야. 물론 그것이 나한테 더 불리할 수도 있겠지.

 

 

 

 이반의 이 말은 그냥 흘려 넘길 수가 없다. 이반은 "논증의 범위를 10분의 1로 축소시키겠지만", "더 불리할 수도 있겠지"라고 말했다. 그러한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이야기를 '아이들'로 한정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반은 뒤이어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설명이 또한 묘하기 그지없다.

 

 

 

    ... 첫째로, 아이들은 바로 곁에 있든, 아무리 더럽든, 또 심지어는 얼굴이 못생겼더라도(그러
    나 내 생각에 얼굴이 못생긴 아이들은 없는 것 같구나) 사랑할 수 있는 존재란다. 둘째로, 내
    가 어른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는 것은 그들이 너무 추악해서 사랑을 받을 만한 자
    격이 없다는 주장말고도, 그들은 천벌을 받고 있기 때문이야. 그들은 사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고, '하느님과 닮게' 되었지.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것을 먹
    고 있어. 그러나 아이들은 아직 아무것도 먹지 않았기 때문에 죄라곤 전혀 짓지 않았지. 너는
    아이들을 사랑하지, 알료샤? 난 네가 아이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러니까 내
    가 왜 아이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어하는지 이해할 거다. 그런데 만일 아이들이 지상에
    서 고통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물론 아버지들, 선악과를 따먹은 아버지들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런 판단은 저세상에서나 가능한 것이고, 지상의 인간들에게는 통용될 수
    없는 것이란다. 죄없는 사람이, 그것도 그토록 죄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 때문에 고통을 겪을
    수는 없어.

 

 

 

 두번째 이유는 그래도 들어줄 만하다. 그러나 첫번째 이유는 정말로 이해하기 힘들다. 아니, 어떻게 이것이 이유가 된단 말인가? 이반은 자신이 왜 신이 창조한 세상을 믿지 않는가라는 극히 예민한 주제를 놓고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게다가 이야기를 '아이들'로 한정하면 자신이 불리해진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그렇게 한정지어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어른은 너무 추악해서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지만 아이는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냉정하게 이반이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이반의 말을 그래그래, 하고 무작정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반은 "너는 아이들을 사랑하지, 알료샤? 난 네가 아이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라며 간사한 목소리로 알료샤에게 말을 걸어 교묘하게 이야기를 '아이들'로 한정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자. 그렇게 '아이들'로 이야기를 한정해서 그에게 불리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분위기가 더 유리한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지 않은가? 즉, 이반은 본래 자신이 내세웠던 이유와 전혀 관계가 없는 또 다른 이유를 내세움으로써 논쟁을 '아이들'로 한정하려고 한 것이다.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은 다른 데에 있다.

 

 그러나 이반의 이야기를 좀더 들어 보자.

 


 
    다시 한번 확실히 주장하는 바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성격에는 다름 아
    닌 유아 학대의 취미가 있거든.

 

 

 

 이반이 말하고 있는 것은 말하자면 인간의 잔혹함이다. 이반은 신이 창조한 세계에서 죄없는 아이들이 얼마나 잔혹한 학대를 받고 있는가에 대해 자신이 수집해 놓은 사례들을 차례차례 열거하기 시작한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터키인들의 슬라브인들에 대한 폭행 -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어린애를 공중으로 던졌다
    가 총검으로 찌른다. 어머니의 품속에 안긴 젖먹이에게 권총을 겨누고는 어린애가 헤헤거리
    면서 손을 뻗어 권총을 잡으려고 하자 아이의 얼굴에 대고 방아쇠를 당긴다.

 

    (2) 프랑스에서 만들어져 러시아어로 번역된 소책자 - 리샤르라는 사생아는 부모가 목동들에
    게 선물로 주어 버린 아이인데,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하고 학대를 받으며 자란다. 리샤르는
    성인이 되어 살인과 강도짓을 저지르다 잡혀서 사령 선고를 받는다. 그러자 각종 기독교 사회
    단체들, 자선 사업가들이 몰려들어 그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고 성서를 가르치기 시작했
    다. 마침내 그는 진지하게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기독교에 귀의한다. 최후의 날에 개과 천선
    한 리샤르를 많은 사람들이 둘러싸고 "너한테는 가장 행복한 날이야, 주님께 가기 때문이지",
    "어서 죽게, 우리 형제여, 주님의 품안에서 죽으라고"하며 '축복'한다. 리샤르는 눈물을 흘리며
    "오늘은 제 생애에서 가장 기쁜 날입니다, 주님께 가거든요!"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그리고 처
    형대로 끌려가 목이 잘린다.

 

    (3) 네크라소프의 시 - 농부가 짐을 잔뜩 실어 기진맥진한 말을 미친 듯이 때리고 또 때린다.
    결국 말이 죽을 만큼 때리는데, 때리는 행위에 도취되어 자기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도 모른다.

 

    (4) 한 인텔리 신사와 그 부인이 일곱 살짜리 친딸을 회초리로 때린다. 매질을 할 때마다 쾌
    감이 점점 더 고조되어 그 행위에 빠져든다. 아이는 마침내 비명을 지를 힘마저 없어진다.
    부모는 재판에 회부되지만 가정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며 무죄 판결이 내려진다.

 

    (5) 마찬가지로 부모에 의한 유아 학대 - 교육도 받고 교양도 갖춘 부모가 다섯 살짜리 어린
    딸을 증오하여 온몸에 멍자국이 들도록 폭행을 가한다. 어느 날 밤,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말
    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엄동설한에 소녀를 밤새도록 화장실에 가둬 둔다.

 

    (6) 퇴역 장군으로, 자기 영지에서 2천 명의 농노를 거느린 영주 이야기 - 하인집의 여덟 살
    짜리 아이가 돌을 잘못 던져서 장군이 아끼던 개의 다리를 다치게 만든다. 화가 난 장군은
    그 아이를, 아이의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수많은 사냥개들에게 물려 죽게 한다.

 

 

 

 이반은 이렇게 길고 긴 이야기를 참기 힘들 만큼 잔혹하게 묘사하고 있다. 아무튼 이렇게 조항별로 정리된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세 번째로 묘한 기분에 휩싸이게 된다.
 이반은 젠 체하며 이야기를 '아이들'로 한정했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그가 제시한 사례에는 아이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2)와 (3)의 이야기가 섞여 있지 않은가? 사실 (3)의 사례는 (4)나 (5)와 본질적으로는 같다고 볼 수 있다. 아이들의 고통이 비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왜 자신이 학대를 받는지 그 이유도 모른 채 학대를 받기 때문'이다. 농부에게 매질을 당한 말도 그렇다. 동물이므로 아이 이상으로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즉 말의 사례는 학대받는 아이들의 고통을 순화하여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2)의 사례는 아이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문맥상 다른 이야기들과 맞지도 않는다. 게다가 이 관계없는 이야기가 분량 면에서도 다른 이야기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길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필요가 있다. 이반이 논쟁을 아이들로 한정하려고 한 비밀이 바로 이 이야기에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이반이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사실 이 이야기가 아닐까? 그러나 이 물음에 답을 하기에는 아직 때가 이르다.

 

 

 

 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최대의 모멸

 

 이반은 이렇게 잔혹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다음에 '미래의 조화'라는 말을 꺼냈다. 조화란 곧 죄인의 후회와 희생자의 용서를 뜻한다. 이반은 '미래의 조화'하는 말을 꺼내면서 "지상의 모든 종교는 그런 희망을 근거로 세워져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이반에게 가장 참기 힘든 부분이었다. 그렇다면 종교를 만들기 위해 아이들을 그렇게 학대했단 말인가? 아이들의 고통은 조화를 연출하기 위한 소재에 지나지 않았단 말인가?

 

 

 

    ... 내 말을 들어 봐. 고통으로써 영원한 조화를 사기 위해 모두가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고 해
    도 왜 아이들이 거기에 있어야 하는 거지? 어디 한번 말해 봐? 어째서 그 애들이 고통을 겪어
    야 하는지 나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 어째서 그 애들의 고통으로 조화의 대가를 치러야 하
    는 거냐고? 어째서 그 애들이 밑거름이 되어서 누군가를 위한 미래의 조화를 이루어야 하냔
    말이야?

 

 

 

 그리하여 이반은 조화 그 자체를 거부했다.

 

 

 

    ... 그리고 그 어머니가 사냥개에게 자기 아들을 물려 죽게 한 가해자를 부둥켜안고 세 사람이
    함께 눈물을 흘리며 "주여, 당신이 옳았나이다"라고 절규할 때 이미 인식의 승리가 도래하고
    모든 것이 해명될 수 있다는 것을 난 알고 있다고. 그러나 바로 여기에 장벽이 가로막고 있
    어서 난 그것을 용납할 수 없어. ... 그때도 난 그렇게 외치고 싶지 않단 말이야. ... 그리고 고
    상한 조화 따위는 완전히 포기하고 말겠어. ... 만약 어린 애들의 고통으로 진리를 구입하는
    데 필요한 고통의 모든 금액을 보충해야 한다면, 나는 미리 단언해 두는 바이지만, 진리 전체
    도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거야. 그리고 그 어머니가, 사냥개들을 풀어서 자기 아들을 물려 죽
    게 한 그 가해자를 포옹하지도 않았으면 좋겠어! ... 만일 용서하고 싶으면 자기 몫만 용서하
    면 되는 거야. 어머니로서의 끝없는 고통에 대해서만 용서하면 되는 거지. 그녀는 결단코 갈가
    리 찢겨 죽은 아이의 고통에 대해서는 압제자를 용서할 권리도 없고, 감히 용서할 수도 없는
    거야.

 

 

 

마지막에 이반은 너무나도 유명한 말을 던진다.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야, 알료샤. 난 그저 입장권을 정중히 돌려보내는 것뿐이
    야."

 

 

 

 이반의 생각이 얼마나 놀라운지, 평범한 무신론자들은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다. "신이 제멋대로 존재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나는 신과 별개로 살아가겠다"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정도로 멋들어지게 신을 비웃는 사상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 알료샤는 단지 "그건 반역이예요"라고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말했을 뿐이다.

 

 


 이반의 허위

 

 그러나 우리는 이 이반의 대사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E.소로비요프는 "이 말(이반의 유명한 대사)은 구체적으로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물음에 다음과 같은 답을 내놓았다.

 

 

 

    신의 왕국에 들어갈 권리는 신의 뜻에 적합한 행위를 했을 때에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그러
    나 적합한 행위가 되기 위한 요건 중 일부는 "살인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와 같은 직접적인 명령에 의해 규정되는 도덕적 생활 태도여야 한다. 또한 일부는 경건
    한 삶의 실례(實例)에 의해 규정되는 도덕적 생활 태도여야 한다.
    그런 이유로 영원한 조화에 들어갈 권리를 거부하는 것은 실제로 단 한 가지만을 의미할 뿐이
    다. 말하자면 미래의 더없는 행복을 위한 도덕적 조건, 즉 일정한 인간 관계를 명령하고 있는
    규준과 모범을 신의 면전에서 거부하는 것이다.

 

 

 

 그후 이반은 그 자신이 나중에 알료샤 앞에서 인정했던 것처럼 "모든 것은 허용된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반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다만 도덕적으로 "모든 것은 허용된다"라고 말한 것이다(실제로 이반을 정신적 기둥으로 떠받들던 이복동생 스메르쟈코프는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살인을 저지른다). 그러나 이반이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은 아이들에 대한 그의 생각이 거짓이었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만약 정말로 '모든 것은 허용된다'라고 생각했다면 당연히 아이들에 대한 학대도 '허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소로비요프는 또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이미 보았듯이 신에 대한 이반의 증오는 신이 부당한 고통을, 특히 아이들의 고통을 못 본
    척 지나쳤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신에 대한 카라마조프적 증오의 결과,
    결국 이반이 배반한 것은 신이 아니라 사실은 아이들의 고통이며, 그 고통에서 비롯된 자신
    의 참기 어려운 분노였다. 즉 그 고통에 지금도 짓밟히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모든
    행위가 허용된다'면 아이들의 고통 역시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논쟁의 대상을 한정한 진정한 이유는?

 

 그렇다면 이반이 논쟁의 범위를 아이들로 한정한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앞서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했다.

"그 어머니가 사냥개에게 자기 아들을 물려 죽게 한 가해자를 부둥켜안고 세 사람이 함께 눈물을 흘리며 "주여, 당신이 옳았나이다"라고 절규할 때 이미 인식의 승리가 도래하고 모든 것이 해명될 수 있다는 것을 난 알고 있다고. ... 만일 용서하고 싶으면 자기 몫만 용서하면 되는 거야. 어머니로서의 끝없는 고통에 대해서만 용서하면 되는 거지. 그녀는 결단코 갈가리 찢겨 죽은 아이의 고통에 대해서는 압제자를 용서할 권리도 없고, 감히 용서할 수도 없는 거야."
 여기에서 '압제자'와 '어머니'만이 조화에 참가하고 있고 살해된 '아이'는 소외되어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지 능력이 낮고 이해력이 없는 아이가 조화에 참가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허용'할 줄 아는 지식의 힘은커녕 그 '허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즉 유일하게 '허용'할 권리를 지닌 인간이 '허용'할 만한 능력을 지니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아이는 온갖 고통만 당하고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타인이 자기 좋을 대로 참가시킨 조화 속에서 상대방을 '허용(용서)'하고 만다. 이반이 날카롭게 지적한 것은 바로 이러한 종교의 기만(欺瞞)이었다.
 그러나 만약 학살된 것이 아이가 아니라 인지 능력을 갖춘 성인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자신의 의지로 '허용(용서)'할 권리뿐만 아니라 허용할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 물론 저세상의 일을 확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살해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와 맞먹는 폭력으로 거의 죽을 뻔한 사람이 자신을 그 꼴로 만든 상대방을 '허용(용서)'한 예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결국 이반의 논쟁은 '허용' 능력이 없는 아이들을 예로 들어야만 비로소 제 기능을 다하게 되어 있었다. 이반 자신도 뒷부분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내 말을 들어 보렴. 난 문제를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어린애들의 예를 끌어들인 거야. 지면에서 중심부까지 온 땅에 스며들어 있는 인류의 다른 눈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어. 나는 고의로 내 테마를 축소시켰던 거야." 그러므로 이반이 제일 처음에 했던 대사, 즉 "그것이 내 논증의 범위를 10분의 1로 축소시키겠지만, 그래도 일부 아이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편이 더 나을 거야"는 얄궂게도 그 말뜻 그대로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반과 같은 지성인이 이러한 자신의 약점을 모르고 있었을 리 만무하다. 리샤르의 사례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생아였던 리샤르는 어린 나이에 목동에게 내버려진다. 교육도 받지 못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짐승처럼 학대받으며 자라난다. 선악의 개념조차 구별할 수 없었던 리샤르는 마침내 어른이 되어 살인과 강도짓을 저지르다 잡혀서 사형 선고를 받는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를 개심시키려고 노력하며, 마침내 리샤르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기독교에 귀의한다. 그리하여 자신은 주님의 은총을 받았다고 눈물을 흘리는 리샤르를 보며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마침내 그를 단두대로 보낸다. 이 장면의 '잔혹함'을 그대로 인용해 보겠다.

 

 

 

    지체 높고 고상하다는 사람들은 모두 리샤르를 찾아 감옥으로 달려가서는 그를 얼싸안고 입
    을 맞추면서, "자넨 우리의 형제야, 자네한테 은총이 내린 거야!"라고 떠들어댔어. 그렇지만
    리샤르는 감격의 눈물을 흘릴 뿐이었지. "그렇습니다. 제게 은총이 내린 겁니다! 어린 시절이
    나 청년 시절에는 돼지죽을 먹는 것만으로도 제겐 기쁨이었는데 지금은 은총이 내렸으니, 주
    님의 품안에서 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면서 말이야. 그러자 사람들은 "그래그래, 리샤르,
    주님의 품안에서 죽게. 남의 피를 뿌렸으니 주님의 품안에서 죽어야 해. 돼지죽이 탐나서 그
    것을 훔쳐 먹고 매를 맞았을 때는(도둑질은 금지되어 있으니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어쨌든 나
    쁜 일이야) 주님을 전혀 몰랐으니 자넨 죄가 없어. 하지만 남의 피를 흘리게 했으니 죽어야
    만 해"라고 말하는 것이었어. 그리고 최후의 날이 다가왔지. 지칠 대로 지친 리샤르는 눈물을
    흘리면서 쉬지 않고 이런 이야기를 되풀이한 거야. "오늘은 제 생애에서 가장 기쁜 날입니다.
    주님께 가거든요!" 그러자 목사들, 판사들, 자선 사업하는 귀부인들이 소리쳤어. "그래, 너한테
    는 가장 행복한 날이야. 주님께 가기 때문이지!"라고 말이야. 사람들은 마차를 타거나 걸어서
    리샤르를 실은 죄수마차를 따라 처형장까지 뒤쫓아 갔어. 그러고는 처형장에 도착하자, "어서
    죽게, 우리 형제여, 주님의 품안에서 죽으라고, 자넨 은총을 받았으니까!"라고 리샤르를 향해
    소리치는 것이었어. 그 형제들의 입맞춤을 받으며 리샤르가 처형대로 끌려가 단두대 아래에
    놓이자, 그에게 은총이 내렸다는 이유 때문에 박애적으로 목이 잘리고 말았지. 이것은 그들의
    특징을 잘 말해 주는 이야기야.

 

 

 

 이 리샤르의 사례는 '인지 능력이 없는 인간에게 조화를 강요하는 것이 얼마나 위선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런 뜻에서 아이들의 예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런 까닭에 이 사례는 마찬가지의 약점을 지니고 있다. 즉 만약 리샤르가 평범한 환경에서 자란 인간으로 남들과 같은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고, 또 스스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한 후에 죽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과연 여기에서 이반의 예로 선택 될 수 있었을까?

 

 


 이반이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것

 

 그러나 필자는 이반이 훨씬 무서운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분명 리샤르는 무지하고, 선악을 구별할 줄 모르며, 또한 아이들과 같은 지적능력 밖에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어른이다. 이반은, 신을 믿는 사람들은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리샤르와 마찬가지로 최면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진리를 인식할 능력이 없다. 소수의 인간만이 진리를, 즉 사실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정신적 자유를 맡길 대상이 사라진다면 살아가지 못한다. 신을 창조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 신을 떠받들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가르치고자 했으며, 하느님의 은총을 믿게하여 최면상태에 빠진 채로 죽음을 맞이하게 했던 것이다. 리샤르 역시 신을 믿은 덕택에 최면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지 않았는가.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대심문관'의 주제이다. 그리하여 이반 카라마조프는 '입장권을 정중히 돌려보내기'는커녕, 신의 실체를 폭로하기 시작했다.

 

 

... 코자이히 데노부의 <논쟁기술>에서 발췌

 

 

Posted by .스트라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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